뉴욕의 이방인들/2



 그렇다. 콘돔 장사. 바로 이 남자였다.....!


 
 콘돔의 실질적 사용 전망이라고는 고비사막의 신기루처럼 아련하기 그지 없는 상황에서, 평소 같았다면 그저 쓴웃음을 짓고 돌아서거나 그것을 구입하는 이들을 향해 추잡한 질투심 만을 불태웠을 터. 하지만 나는 절박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이방인들의 면상에 대통령 후보의 얼굴이 그려진 콘돔 상자를 들이대는 남자 아닌가. 'Public humiliation'의 차원에서 고찰해 볼 때, 나는 뉴욕 지하철 밑바닥의 쥐새끼만큼이나 안전했다. 잠시 꽁무니를 뺐던 자신감이 다시 한번 가슴 밑바닥에서 벅차오르고 있었다. 나는 곁눈질 하지 않고 그를 향해 당당히 행진했다. 


 "안녕하세요.(미소)"
 "오바마 콘돔, 아니면 맥케인 콘돔?" 개시 손님을 맞이하는 힘차고 경쾌한 목소리로 남자가 되물었다.
 "아니 아니, 콘돔을 사려고 하는 것이 아니에요. 잠깐 대화좀 할 수 있을까 해서요.(미소)" 
 "무슨 대화?" 남자의 눈동자에 영롱하게 어른대던 빛이 순식간에 흙탕물 처럼 탁해졌다. 다시 한번, 등골에 식은 땀이 흘렀다. 하지만 이제는 익숙한 상황이다. 더이상 나는 쉽게 꺾이지 않는다. 생존 본능에 불타오르는 나의 작은 두뇌는 재빨리 최선의 방책을 도출해냈다. '아부'만이 살 길일지어다.

 
 "아니 그러니까 말이죠, 대통령 선거를 소재로 콘돔을 만들다니! 정말 재치있네요!!! 와아!!!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어요?!"
나는 가증스런 열의와 조작된 흥분을 최대한 꼭꼭 눌러 담아 소리 질렀다.    
 "하하하." 남자의 웃음에는 확연히도 한층 누그러진 관용이 배어나왔다. 나는 얼빠진 패배자에서 정교한 혓바닥으로 뭇 남성들을 후리는 공작부인의 자리에 등극했다.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사실, 이건 내 친구의 아이디어였어. 요새 대선이 사람들을 거의 미치게 만들고 있잖아. 온통 편을 갈라서 물어뜯고 싸우고.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고 스트레스받기보다는, 이 상황을 다같이 좀 즐길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서 시작된 거야." 남자의 눈동자에는 자수성가한 사업가의 꼿꼿한 자신감이 어른거렸다. 나는 어깨를 꼭 붙들고 있던 긴장을 살그머니 풀었다. 
 
 "'Practice Safe Policy'라는 회사도 차렸어. 일종의 벤처기업이라고 할 수 있지. 얼마 전에 뉴스에도 나왔는데, 혹시 봤어? 처음에는 장난처럼 시작했는데 아주 반응이 폭발이라니까. 하하하하하." 
 폭발적 반응인데 공원에 나와서 품팔이 하고 있니? 라는 질문이 용수철처럼 튀어나와 입가를 간질였다. 하지만 나는 경박스런 한마디로 상황을 초치는 대신 교장 선생님의 훈화를 대하는 마음 가짐으로 얌전하고 차분하게, 그리고 사려깊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바마 콘돔이 아직은 앞서고 있지만, 맥케인이 지금 뒤를 바짝 쫓고 있어. 그러니까 끝에가서 누가 웃을지는 아직 모르는 거야, 그치?" 남자는 입가를 가늘게 찢으며 공모자의 미소를 지었다. 
 "근데 정말로 진지하게, 사람들이 이걸 사용할 거라고 생각해?" 아부의 다음 단계는 무지함을 가장한 안전한 도발. 
 "오, 넌 정말 뭘 모르는구나. The best politics are happening in bed, BABY-" ....베이비, 베이비, 베이비....젠장, 다시 한번 불편해졌다. 그리고 이 남자, 결코 호락호락한 인간이 아니었다. 

 "한 박스에 2개가 들어있고, 9.95달러야. 오바마 살거야, 맥케인 살거야?" 내가 "베이비"에 몸서러치며 잠시 집중력을 잃은 사이 어느새 그는 세일즈 모드로 돌아서 있었다. 
 "아니...저기..아까 말했지만, 나는 콘돔을 사려고 하는 게 아니라.." 
 "왜 안사? come onㅡ, 콘돔은 많이 준비해놓으면 준비해놓을수록 좋잖아?"
 "저기,,그러니까 나는 별로 콘돔을 쓸 일도 없고..."
 "콘돔을 쓸 일이 없어? come on, baby-! 남자친구 없어?"
 "..없어..." 나는 풀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왜?"
 "뭐?"
 "왜?"
 "왜라니?"
 "왜 남자친구가 없다고 생각해?"
 "......" 
 







 그것은 참으로 존재론적인 질문이었다. 왜 나에겐 남자친구가 없을까. 그 순간 나의 머릿속엔 수천가닥의 상념들이 빛의 속도로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내가 만들기 싫어서 안 만든게 아니라고, 젠장. 나는 항상 최선을 다하는데 남자들이 도망가버리는 걸 어떡해. "난 너에게 너무 부족한 남자야" 따위의 쓰레기같은 헛수작은 더이상 감당을 못하겠다. 아니면 어쩌면 정말로 나한테 뭔가 심각한 결함이 있는 걸까. 그럴 지도. 그래도 아직 스물 여덟이니까 괜찮아. 아니 별로 많이 괜찮지는 않지만 아무튼간에. 나에게 맞는 사람을 만나지 못한 것 뿐이야. 아니면 말지 뭐. 흥. 갑자기 엄마가 거실에 나란히 앉아 애끓는 목소리로 "너 레즈니?" 물어봤던 그 날 밤이 생각나네. 엄마 난 정말 남자를 좋아한다구요. 그리고 A급 남자는 B급 여자를, B급 남자는 C급 여자를 만나기 때문에 A급 여자는 오히려 짝 찾기가 힘들다잖아. 그래 난 A급이야. 아 이따위 자기 기만은 그만두자. 하지만 솔직히 만들고자 하면 만들 능력이 없는것도 아니라고. 접근하는 남자들이 99.999% 괴상해서 그렇지. 아 모르겠다. 아니 그런데 지금 왜 내가 너한테 그런 질문에 대답을 해야 하는 건데....?
 

 나는 좌절과 분노와 황망함이 뒤섞인 표정으로 멍하니 남자를 바라봤다. 더 이상 무슨 말을 해야할 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공작부인의 부채는 꺾였고, 구두는 굽이 나갔다. 나의 전의는 송두리째 뿌리 뽑혔다. 다시 한번, 간절하고도 간절하게 어딘가로 숨고 싶었다.  

 그 순간 남자가 호주머니에서 종이와 펜을 꺼내더니 뭔가를 쓰기 시작했다. 뭐, 뭐지?? 전화번호를 적는 건가?? 남자친구 없다니까 지금 나한테 작업하는 거야?? 그것봐, 내가 아주 능력이 없는 건 아니지.....아무튼 이 놈의 인기란.... 




 남자가 쪽지를 건넸다. 종이에는 9살 짜리가 쓴듯한 비뚤빼뚤한 글씨로 이렇게 적혀있었다.  

 
www.practicesafepolicy.com

"마음이 바뀌면 우리 웹사이트 들어와. 온라인 주문도 가능하니까."

 






 
 

 집에 돌아간 나는 그가 적어준 웹사이트에 접속했다. 물론, 온라인 주문을 하지는 않았다. 
 'obama condom'을 키워드로 구글링을 하자 실제로 몇편의 기사를 찾을 수 있었다.
 남자는 최소한 거짓말쟁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condom dude께서 던지신 존재론적 질문은 앙칼진 가시처럼 박혀 나를 괴롭혔다. 나는 냉장고를 열어 따지 못한 사과쥬스를 망연히 바라봤다. 실패, 실패, 실패로 돌아간 나의 예전 관계들이 망령처럼 어른대고 있었다. 유독 연애 문제에 있어서 나는 몇배는 민감하고, 패배적이고, 이성적이지 못하고, 어리석다. 


 합!!!!!!!!
손바닥을 마주쳐 찰싹 때린 뒤 최대한 야무진 표정을 지었다. 사과 쥬스 대신 다이어트 라임 콜라를 한잔 가득 따라 컵을 들고 다시 노트북 앞에 앉았다. 아무래도 긴 밤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렴, 어쨌거나 난 이방인과의 대화에 성공했다. 톡 쏘는 탄산의 경쾌함을 목구멍으로 느끼며, 나는 나의 작은 승리를 자축했다.





by beatnik | 2008/10/05 08:03 | Life | 트랙백 | 덧글(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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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at 2008/10/05 14:04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beatnik at 2008/10/06 00:58
ㅋㅋㅋ 아 몰라요 몰라. A급 B급 하니까 갑자기 한우 고기 먹고 싶다..;;;
Commented by JinAqua at 2008/10/05 15:15
홈페이지 눌러보니 페일린 것도 나왔군요 -ㅁ-;; 머엉..
Commented by beatnik at 2008/10/06 00:58
그러니까요. 그새 만들었다능. 남자들한테 인기 좋지 않을까;; 미국 남자들 페일린 'hot'하다고 난리거든요.
Commented by 안냥 at 2008/10/05 21:29
부산 다녀왔더니 이리도 흥미진진한 포스트가 올라와 있었구료.
TV는 장만한겨? 나도 요즘 스튜디오60에 빠져들고 있어.
알렉 볼드윈 넘 귀여워 ㅋㅋㅋㅋ & 새로 시작한 드라마도 섭렵해줘야짐.
덱스터도 시작했고, 프린지도 제법 재미있다우.
이런 토크를 할 상대의 부재로....덧글에 토크 소재를 뿌리고 가는 안냥. ㅠ_ㅠ

그나저나, 저 콘돔듀드 너무 해맑으시다;

+
나 이번 시즌에 미드 몇개 보는지 알어? -0-;; 11개.
Commented by beatnik at 2008/10/06 01:02
아항 부산 갔다왔구나-. (이번 부산팀 누구여?) 근데 알렉 볼드윈? 스튜됴60가 아니라 써티락 말하는거 아뇨? 알렉 볼드윈 확실히 귀엽지!!! 투덕투덕 살은 쪄서ㅡ곰돌이 같이ㅡ. 난 덱스터는 파일럿만 봤어. TV없고 인터넷 훔쳐쓰다보니 미드의 원활한 공급에 좀 차질이.....캘리포니케이션은 봤수?

토크할 상대의 부재로..덧글로 답하는 나...ㅠ_ㅠ

Commented at 2008/10/06 10:09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beatnik at 2008/10/06 11:05
헛....허허허......(잠시 이해하는 데 시간이 걸렸습니다만) 것참...만만찮게 가슴 시린 이야기네요...허...
Commented by 안냥 at 2008/10/06 14:37
어 30 Rock 이다.
스튜디오 60는 아직 입문 못했음. +_+
아 졸려. 오늘 회사에 사람 열라 없오. :)
Commented by beatnik at 2008/10/07 00:46
메신저 버디가 없으니 심심하지???ㅋㅋ 빨리 뉴욕으로 와버려..나 TV얻었다. 이제 외로움이여 안녕-! 그리고 DVD 플레이어도 얻게 됐따는;;; (30 rock rocks!!!!)
Commented by 연™angie at 2008/10/07 03:44
old but not expired에 풋.하고 웃고 지나갑니다ㅋ
Commented by beatnik at 2008/10/08 02:17
저도 그 대목에서 웃었어요. 센스가 있다니까요-
Commented by 달로스 at 2008/10/07 05:10
콘돔 듀드 ㅋㅋㅋㅋㅋㅋ 네이밍센스에서 뿜었어요
Commented by beatnik at 2008/10/08 02:17
그렇게밖에 표현이 안되더군요. 듀드-;;
Commented by sputnik at 2008/10/08 01:21
이건 뭐; 블로깅 접기 달인이네??

그나저나 환율이 미친듯이 오르던데 괜찮아?
하필 이런 시기랑 맞닥뜨렸냐.

이미 필요한 돈은 다 환전했는감??
Commented by beatnik at 2008/10/08 02:18
아; 이런걸 블로깅 접기라고 하니?;;
돈은 당분간 문제 없을 정도로 두둑히 바꿔갔지. 캴캴캴...(나의 도토리 식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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