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남자가 있다. 남자는 매일 아침 8시12분 뉴욕으로 가는 열차를 탄다. 매일 그는 같은 칸, 같은 좌석에 앉는다. 남자는 매일 오후 5시17분 집으로 돌아가는 열차를 탄다. 매일 그는 같은 칸, 같은 좌석에 앉는다. 남자는 20년 동안 같은 일과를 반복해왔다. 그리고 어느날 오후 5시17분, 남자는 평소처럼 그랜드 센트럴의 플랫폼에 선다. 그는 계단에 발을 올려놓는다. 그리고 그는 갑자기 멈춘다. "Oh, hell" 남자는 계단에서 발을 내려놓는다. 남자는 뒤돌아선다. 그리고 남자는 어딘가로 사라진다. 도로시 파커의 단편소설 Such a Pretty Little Picture의 주인공 Mr, Wheelock은 결혼 8년차의 중년 남자다. 직장, 집, 딸, 아내, 평온하게도 혹은 지독하게도 똑같은 리듬으로 흐르는 일상. Mr, Wheelock은 언젠가 신문의 귀퉁이에서 읽은 한 남자의 일화를 천천히, 달콤하게 음미한다. 그러니까 언젠가는 그 또한, "Oh,hell"이라고 내뱉은 뒤 뒤돌아서 사라져버릴 것이다. 언젠가는, 언젠가는..... 맨하탄 42번가. 열차가 도착하고 열차가 출발하는 곳. 그랜드 센트럴은 통근객들이 밀려들고 밀려나가는 뉴욕의 구심이다. 혹은 분주한 일상의 무게 아래서 잠시 떠남을 상상하고 새로운 출발을 몽상하는 곳이다. 별자리가 그려진 우아한 아치 아래로 열차 시간표가 분주하게 반짝거리고, 시계 초침이 짤깍이며 움직인다. 그랜드 센트럴에는 공항의 살균된 공기에서는 느낄 수 없는 나른한 향수가 있다. X-ray 기계와 보안 검색의 불편한 긴장이 소거해버리는 아련한 낭만이 있다. 그러니까 그랜드 센트럴은 소독약 냄새보다는 몽롱한 체취로 가득하다. 그랜드 센트럴에는 어느 순간, 열차칸에서 발을 내려놓고 사라져버리는 남자의, 또는 어느 순간 편도행 열차표를 끊고 낯선 곳을 향하는 여자의, 꿈결같은 체취가 있다. 그랜드 센트럴은 마침표 없는 산문처럼 공기가 흐르는 곳이다. 그랜드 센트럴에 모여든 사람들은 걷고, 걷고, 걷고, 또 걷는다. 다리와 다리가 시계추처럼 교차하고, 또각거리는 발소리가 팝콘처럼 우수수 쏟아진다. 그랜드 센트럴을 처음으로 찾는 이들을 향한 낡은 충고. "절대로, 승객과 그의 열차 사이에 서지 마라." 그랜드 센트럴의 터미널에서 슬쩍 멈추어섰다간, 사정없이 어깨를 밀치고 지나가는 행렬에 불친절한 습격을 당하기가 쉽다. 하지만 성급히 화를 내지는 말자. 그건 무례함이라기보다는 무의식에서 비롯된 결과이니까. 그랜드 센트럴의 흐름, 그 거대한 물결을 형성하는 이들의 눈은 눈 앞을 향하고 있지 않다. 허공에 느슨하게 걸린 시선은 떠나야 할 장소를 향해, 도착할 그 곳을 향해, 혹은 달아나고 싶은 그 어딘가를 향해 나른하게 어른거린다. 그랜드 센트럴은 그 자체로 제법 완결된 공간이다. 그랜드 센트럴에는 뉴스 스탠드가 있고, 서점이 있고, 레스토랑이 있고, 카페가 있고, 선물가게가 있고, 바가 있고, 구두 닦이가 있다. 하지만 그랜드 센트럴은 손님을 반기되 그들의 소매 끝을 애써 붙들지 않는다. 흐름의 중간에 정류장을 형성하되 흐름을 막으려 들지는 않는다. 그러니까 그곳은 근육을 완전히 이완한 채 머무르기보다는 떠남을 준비하며 잠시 숨을 고르고 발목을 풀어놓는 곳이다. 그랜드 센트럴을 밝히는 것은 천장에 알알이 박힌 작은 전구들이다. 전구들이 쏟아내는 오렌지 빛의 조명은 지나치게 밝지도 지나치게 어둡지도 않다. 그건 딱 마음에 미풍을 일으킬 정도의 밝기다. 미풍은 휴식을 취하던 이들의 심장을 간지럽히고, 그들을 일으켜 세우고, 그들의 발걸음을 재촉한다. 그랜드 센트럴에 모여든 이들은 걸어다니며 피자를 먹고, 콜라를 마시고, 프렛젤을 먹고, 맥주를 마시고, 초콜렛을 입에 던져 넣는다. 그랜드 센트럴은 침묵이 달아나버린 곳이다. 소리와 소리가 모여 하나의 군락을 이룬 곳이다. 발소리, 말소리, 커피 기계 소리, 트렁크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 구두닦이들이 행인을 유혹하는 소리가 몸과 몸을 섞은 채 파도처럼 출렁인다. 하지만 그랜드 센트럴에는 또한, 그 모든 소리에서 떨어져 나온 하나의 소리가 있다. 들리지 않는 소리, 혹은 두 사람의 귀에만 들리는 소리가 있다. 그랜드 센트럴 Oyster Bar앞, 세 개의 홀이 하나의 아치 아래 모이는 교차점에는 Whispering Gallery가 있다. 이 곳은 그랜드 센트럴이 품고 있는 비밀스런 속삭임의 공간이다. 틈과 틈 사이로, 둘 만의 이야기가 흐르는 공간이다. 이를테면 두 사람은 대각선으로 마주 본 두 개의 기둥 앞에 선다. 한 사람은 기둥 틈에 입을 대고 다른 한 사람은 기둥 틈에 귀를 댄다. 한 사람이 기둥 틈 사이로 말을 속삭이면, 그 말소리는 천장을 지나 맞은편의 기둥 틈 사이로 흘러나온다. 어느 날인가 이 곳에는 한 쌍의 연인이 선다. 남자는 오른 손에 검은색 트렁크를 들었고, 여자는 어깨에 작은 핸드백을 걸었다. 두 사람은 등을 맞댄 채 기둥 틈에 얼굴을 바짝 대고 무언가를 속삭인다. 두 사람 사이로 커다란 배낭을 짊어진 청년이 지나간다. 두 사람 사이로 손에 신문을 말아 쥔 할아버지가 지나간다. 두 사람 사이로 양복을 입은 한 무리의 남자들이 지나간다. 두 사람은 여전히 기둥 틈새에 얼굴을 바짝 대고 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남자는 하하하, 하고 낮은 목소리로 웃는다. 여자도 하하하, 하고 가볍게 웃는다. 두 사람의 얼굴은 조금 창백해졌지만,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보지 못한다. 이내 남자는 검은색 트렁크를 끌고 플랫폼을 향해 떠난다. 여자는 가만히 선 채 잠시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그리고 이내, 여자는 뒤돌아서 걷는다. 그랜드 센트럴의 흐름을 관장하는 단 하나의 룰은 바로, 시간이다. 그러니까 그랜드 센트럴에서 가장 사랑받는 존재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시계다. 뉴스스탠드에서 신문의 헤드라인을 훑어내리던 노인은 소매 끝을 살짝 밀어 손목 시계를 확인하고, 시간표를 확인하던 청년은 서둘러 남은 피자를 입 안에 구겨넣고, 의자에 앉아있던 아주머니는 벽시계에서 눈을 떼자마자 딸의 손목을 붙든 채 황급히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뉴헤이븐으로 향하는 열차는 6시29분 출발이다. 6시26분. 모데라토. 승객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한다. 6시27분. 알레그레토. 발걸음이 빨라진다. 6시28분. 알레그로. 지각생들이 숨을 헐떡이며 입구로 달려든다. 6시29분. 열차는 떠난다. 하지만 열차를 놓쳤다고 해도 크게 낙담할 필요는 없다. 그랜드 센트럴의 시간표는 미처 숨을 고를 새 없이 새로운 출발과 새로운 도착을 시시각각 토해 놓으니까. 아니 어쩌면, 열차를 놓쳤다는 것은 하나의 기회일 수 도 있다. 그러니까 당신은 다음 열차표를 끊기 전, 잠시 매표소 앞에 멈춰선 채 생각을 할 수도 있다. 당신은 다른 곳을 향하는 열차를 탈 수도 있다. 당신은 등을 돌린 채 뉴욕의 밤거리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나갈 수도 있다. 그랜드 센트럴은 그 모든 망설임을 헛된 공상이 아닌 하나의 가능성으로 만들어버리는 마력이 있다. 당신은 구두 끝을 비비며 생각에 잠긴다. 바로 지금, 혹은, 언젠가는, 언젠가는....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그랜드 센트럴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플랫폼을 가진 기차역"이다. 론리 플래닛에 따르면 그랜드 센트럴은 "예술적 가치를 지닌 건축물"이다. 혹은 한 뉴요커의 말에 따르면 그랜드 센트럴은 "뉴욕이 간직하고 있는 최고의 우아함"이다. 하지만 나에게 그랜드 센트럴은 무엇보다, 이방인의 옷이 더이상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는 곳이다. 떠남과 돌아감의 지치지 않는 발소리가 움추렸던 어깨를 곧게 세우고, 새로운 시작을 향해 뭉클대는 몽상이, 꿈이, 가능성의 덩어리들이 위축됐던 가슴에 달콤한 숨을 불어넣는다. 세찬 심장 박동처럼 손님을, 통근자를, 여행자를, 끊임없이 받아들이고, 또 쏟아내는 그랜드 센트럴은 멈추지 않는 뉴욕의 얼굴이다. 경계를 희롱하고 정체를 냉소하며 변화를 노래하는 뉴욕이 그곳에 있다. 그래서 나는 그랜드 센트럴에 갈 때마다, E.B.화이트의 글을 떠올린다. "뉴욕은 세 가지의 모습으로 존재한다. 첫번째는 이곳에서 태어난 이들의, 도시를 당연하게 생각하고 그 규모와 혼란함을 자연스럽고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이들의 뉴욕이다. 두번째는 통근자들의 뉴욕, 매일 메뚜기떼가 삼켰다가 뱉어내는 그 뉴욕이다. 세번째로, 다른 곳에서 태어나 무언가를 쫓아 뉴욕에 모여든 이들의 뉴욕이 있다. 이 일렁이는 세 개의 뉴욕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세 번째의 뉴욕이다. 마지막 목적지로서의 도시, 목표로서의 도시. 뉴욕의 예민한 기질과 시적인 품행을 설명하는 것이 바로 이 세번 째의 뉴욕이다. 예술에의 헌신과 그 비교할 바 없는 성취를 설명하는 것이 바로 이 세번 째의 뉴욕이다. (....) 이들은 하나하나가 뉴욕을 첫사랑의 강렬한 흥분으로 포옹한다. 하나하나가 뉴욕을 모험가의 신선한 눈으로 흡수한다. 그리고 하나하나가 에디슨 컴퍼니를 왜소하게 만들어버릴 정도의 열기와 빛을 발산한다." 그리고 나는 다시, E.B화이트의 작은 조언을 기억한다. "New York can destroy an individual, or it can fulfill him, depending a good deal on luck. No one should come to New York to live unless he is willing to be lucky." 나는 숨을 고르고, 천장을 향해 고개를 꺾는다. 그리고 나는 그랜드 센트럴의 별자리를 헤아리며, 잠시 나의 운을 기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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