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어 맨하탄, New York Supreme Court 앞 Foley Square에는 자그마한 부스가 하나 서 있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원 관리소 정도로 생각하고 무심코 지나칠 이 부스는 사실, 이야기가 기록되는 곳이다. 그러니까 이야기가 기록된다는 것은 이런 뜻이다. 당신과 당신의 친구, 부모님, 연인, 혹은 그 누군가가 함께 부스에 들어간다. 부스 안에는 방음 장치가 된 작은 방이 하나 있다. 당신과 당신의 상대는 그 작은 방으로 들어가 탁자의 양 편에 마주보고 앉는다. 탁자 위에는 커다란 마이크 2개와 티슈 한 통이 마련되어있다. 이제 약 40분 동안 두 사람은 자유롭게 대화를 나눈다. 그것은 사랑 고백일 수도 있고 가슴 아픈 과거일 수도 있고 서로에 대해 쌓아왔던 불만일 수도 있도 삶을 뒤흔든 경험일 수도 있으며 수십년 동안 감추어 온 비밀일 수도 있다. 화제는 자유이고 대화를 하는 방식도 자유이다. 다만 방을 나서는 순간 당신은 CD 한장을 받는다. 당신과 상대가 나누었던 시간은 그렇게 기록되었다. Story Corps라는 비영리단체에 의해 무료로 운영되는 이 부스는 "honor and celebrate one another’s lives through listening"이라는 단순하고 아름다운 취지를 내걸고 있다. 2003년부터 시작된 이들의 이야기 채집 운동, 혹은 구술 역사 프로젝트를 통해 이미 수만명의 삶의 한 조각이 음성으로 기록되어 남았다. Story Corps에 신원을 밝히는 것은 자신의 자유다. 혹은 그날 녹음된 당신의 이야기가 국회도서관에 보관되길 원하는 것도 당신의 선택이다. 내가 이 곳을 찾은 것은 일본에서 온 친구 N과 함께였다. 부스에 들어서기 전, 우리는 우리가 과연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40분을 채우지 못해 어색해지는 것은 아닌가 따위를 놓고 뭉기적거렸다. N은 내성적이고, 말을 하기 보다는 늘 상대방의 이야기에 조용히 귀를 기울이는 친구다. 나는 N에게 내가 먼저 많은 질문을 던질테니 걱정 말라고 다짐을 했다. 하지만 방 안에 들어서는 순간 우리의 조바심은 성급한 것임이 판명되었다. 한 낮의 따가운 빛이 가려지고 얼굴에 오렌지 빛의 은은한 조명이 떨어지는, 편안하고 부드러운 침묵이 흐르는 이 작은 방은 마법 같은 공기로 우리를 무장해제시켰다. N은 내가 무어라 미처 단서를 던지기도 전에 이야기를 하고, 이야기를 하고, 또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나는 그가 갖고 있던 너무나 아픈 기억을 공유하게 되었다. 지난 몇 달동안 수업을 들으며 함께 어울리는 동안 결코 알지 못했던 N이 그곳에 있었다. N 역시 나에 대해 비슷한 느낌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Story Corps가 제공하는 것은 한 뼘만한 장소이고, 당신이 필요로 하는 것은 한 토막의 시간이다. 하지만 그 시간은 나와 당신이 마주 바라본 시간이고 우리의 이야기가 존재하는 시간이다. 그건 굳이 음악이 흐르지 않아도, 술잔을 부딪히지 않아도, 그저 눈과 눈을 맞추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그 자체로 즐겁고 기쁜 일이었음을 상기하는 시간이다. 그건 이야기를 통해 누군가를 알아가는 것, 그 원초적인 경험의 소중함을 기억하는 시간이다. 스물 여덟해 동안 다른 길을 걸어온 한국여자와 일본남자의 삶은 뉴욕에서 잠시 교차했고, 그 어느날 한 순간 우리가 나누었던 시간은 그렇게 기록되었다. 그리고 그 기록은 연인과 친구, 어머니와 아들, 할아버지와 손녀가 나누었던 무수한 대화의 조각들과 함께 미국 의회도서관에 보관될 것이다. 어쩌면 세월이 많이 흐른 뒤, 할머니가 된 내가 젊은 날의 한 순간을 반추하기 위해, 그 시절의 목소리와 웃음과 한숨을 느끼기 위해 의회도서관의 자료실을 찾을 지도 모르겠다. 그건 상상 만으로도, 마음이 조금은 따뜻해지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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