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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누군가를 만났을 때, 그 누군가에게 호감을 느낄 때, 그 누군가를 더 알고 싶다고 생각할 때, 그리하여 그 누군가를 위해 일상의 한자락을 열었을 때, 삶은 짜릿해지고, 엉클어지며, 부산해지고, 자존심과 자괴감이 몸을 섞고, 신경이 첨예하게 벼려지고, 호기심은 강해지고, 인내심은 엷어지며, 그 어떤 계획도 너무나 쉽사리 부서져버린다. 예측 불허의, 감정 과잉의, 어지러운 만큼이나 중독적인 현기증을 동반하는 시기. 한국여자는 미국남자를 만난 뒤 한달 남짓한 시간을 안개 속에서 걸어다녔다. 날짜에 대한 감각이 없어졌고, 요일과 요일의 경계는 뭉그러졌다. 시간에 대한 최소한의 분별을 갖게 한 것은 아마도 수백통에 가까울 텍스트 메세지였다. "일어났어?"로 시작해서 "잘 자"로 끝나는 티끌같은 메세지들. 한국여자는 미국남자가 타전한 문자를 확인하며 하루를 열었고, 수업 도중 줄곧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불량한 습관을 길렀으며, 문자와 문자 사이의 공백이 길어질 때면 초조함을 느꼈다. 그건 사실 한국여자에겐 놀라운 발견이었다. 아마도 꽤 오랜 시간 동안 한국여자는 남녀관계에 있어서 조바심, 혹은 그에 비슷한 감정을 느껴보지 못했다. 한국여자는 언제나 묻기보다는 답하고, 연락을 하기보다는 연락을 받고, 답장을 기다리기보다는 답장을 손에 쥔 채 다른 곳에 신경을 쏟는 타입이었다. 상대방의 조바심을 감지할 때면 한국여자는 미안하다기보다는 불편했고, 다소 무례하게도 짜증이 났다. 한국여자는 잊고 있던 감정을 새롭게 발견한 것이 신선했으며, 즐거웠다. 문제가 있다면, 그동안 어딘가에 쳐박혀 꾸역꾸역 누적되어있었을 감정이 출구를 발견하자 보란듯이 거세게 밀려든다는 점이었다. 한국여자는 집중력을 잃었다. 한국여자는 고대하던 책을 읽을 때조차 활자를 건성으로 훑어내리는 자신을 발견했다. 백치처럼 같은 문단을 세네차례 반복해 읽으면서 한국여자는 당황했다. 하지만 금세, 희부연 안개가 한국여자를 휘감았다. 생각을 한다는 것이, 판단을 내린다는 것 자체가 지나친 노동처럼 느껴졌다. 이성이 극도로 엷어졌다. 미국남자는, 스무살이었다. 그리고 미국남자는 스무살의 미국남자처럼 시간을 보냈다. 음악, 술, 춤, 게임, 그리고 갖가지 소모적인 놀이들. 스무살은 탕진을 찬양하며 엇나감을 숭배하는 나이가 아니던가. 한국여자는 스무살의 자신을 떠올렸다. 무모하고 용감하며 어리석었던 시기였다. 하지만 그 시절 수업을 제끼고 한국여자가 기어든 곳은 언제나 술집도 클럽도 아닌 강의실에서 몇걸음 떨어지지도 않은 도서관이었다. 미국남자와 한국여자는 너무나 달랐다. 그리고 다름은 종종 한국여자에게 거부감보다는 호기심을 불러일으켰고, 단점이 아닌 매력이었다. 한국여자는 미국남자의 엉성한 옷차림이 실망스럽다기보다는 재미있었고, 어느날은 심지어 짝이 다른 운동화를 신고 나타난 미국남자가 잊을 수 없이 귀여웠다. 미국남자는 한국여자의 정돈된 아파트에 대해 빈정거리며 "작은 병원"이라는 촌평을 했고, 한국여자가 가방 안에서 티슈를, 챕스틱을, 핸드크림을 꺼낼 때면 고개를 휘휘 저으며 한국여자를 "걸 스카우트"라고 불렀다. 한국여자는 서로의 영역에 대한 매혹을 공격으로 에둘러 가장하는 유머가 즐거웠고, 매끈하게 서로를 겹치는 대신 살갗을 밀쳐내고 자극하는 부조화에, 아귀가 들어맞지 않는 모서리의 존재에, 짜릿한 설렘을 느꼈다. 미국남자는 한국여자를 뉴욕 20대들의 night life로 이끌었다. 한국여자는 미국남자의 손을 잡고 맨하탄과 브루클린을 종횡하며 바와 클럽에 발도장을 찍었다. 역으로 한국여자는 미국남자를 극장으로, 서점으로, 미술관으로 이끌었지만 언제나 승자는 미국남자였다. 한국여자는 맥주를 마셨고, 귀를 찌르는 음악에 맞춰 몸을 움직였으며, 생전 처음보는 젊은이들과 시시하고 가벼운 대화를 섞는 것에 익숙해졌다. 밤은 요란하고 생생했으되, 아침은 몽롱하고 낯설었다. 한국여자의 일상은 뒤틀어졌다. 한국여자는 안개 속에 있었다. 친밀함의 다음 단계는 친밀함을 공유하는 것이다. 미국남자는 한국여자에게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를 소개해주겠노라 했다. 친구의 이름은 Doug이다. 미국남자는 그와 같은 고등학교를 다녔다. 한국여자는 미국남자와 함께 Doug의 집에 놀러가기로 했다. 그의 집은 한국여자의 집에서 크게 멀지 않은 어퍼이스트 사이드에 있었다. 한국여자는 건물에 들어서는 순간 놀랐다. 어퍼이스트 사이드라는 지명이 갖는 아우라가 더이상 완벽하게구현될 수 없을 만큼 건물은 호화로웠다. 유니폼을 갖춰입고 인사를 건네는 도어맨을 지나 로비를 걸어가며 한국여자는 고급 호텔에 들어서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매끄러운 대리석 바닥, 천장의 샹들리에, 고급스러운 탁자와 꽃장식, 모든 것이 하루 전에 갖추어진듯 흠 없이 완벽했다. 한국여자는 다소 압도된 상태로 Doug의 집에 들어섰다. Doug은 금발에 키가 컸고 파랗지만 다소 흐리한 눈동자를 갖고 있었다. 한국여자는 그와 짧은 인사를 나눴다. 한국여자는 Doug의 집안 풍경에 더욱 압도당했다. 놀랍게도 그의 집은, 미로를 연상케 할 정도로, 컸다. 가구 하나하나가 의심할 여지없는 고가의 것들이었고, 공들여 고른 티가 역력했다. 한국여자에게 가장 즐거운 발견은 거실의 두면을 바닥부터 천장까지 채운 커다란 책장이었다. 피츠제럴드, 헤밍웨이, 존 치버, 도널드 바셀미, 레이먼드 카버, 마이클 샤봉, 조나단 사프란 포어 등 한국여자가 좋아하는 작가들이 가득했다. 책장 옆 커피 테이블에는 주노 디아즈의 신간이 읽다만 채로 펼쳐져있었다. 한국여자의 호감도가 순식간에 급상승했다. 한국여자의 속내를 읽은 듯이 미국남자가 다가와 속삭였다. "그 책 전부 Doug 부모님 거야." "뭐? 정말? 아...난 이 책이 네 친구 컬렉션인 줄 알고 반가워하고 있었는데." "Doug은 절대로, 절대로, 책을 안 읽어.(웃음)" "맥주 마실래?" Doug이 six pack을 들고 나타났다. 한국여자와 미국남자는 각자 한 병씩을 뽑아들었다. "By the way, I got some weed too." Doug이 맥주를 꿀꺽 목구멍으로 넘기며 말했다. 한국여자가 무어라 반응하기도 전에 Doug은 너털너털 방으로 들어가더니 작은 지퍼백과 파이프를 들고 돌아왔다. 그는 소파에 푹 주저앉아 weed를 태우기 시작했다. 쑥 냄새 비슷한, 무어라 딱부러지게 표현할 수 없는 그 특유의 냄새가 한국여자의 코 끝을 간질였다. "You want?" 그가 한국여자를 바라보며 파이프를 내밀었다. *다음 이야기는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 ※ 로그인 사용자만 덧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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