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욕의 밤이다. 한국여자는 저녁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이었다. 갑자기 비가 후두둑 떨어지기 시작했다. 한국여자는 우산이 없었다. 한국여자는 신문으로 대충 머리를 가린 채 잰걸음으로 뛰었다. 빗줄기가 거세졌다. 한국여자는 바로 눈 앞에 보이는 아파트 건물 차양 아래로 잠시 몸을 피했다. 비는 사그라들 기세가 없어보였고, 쌀쌀한 바람까지 불기 시작했다. 몸이 오슬오슬 떨렸다. 한국여자는 빗줄기에 대고 조금 어색하게 "제길ㅡ"하고 내뱉었다. 그 순간 어둠 속에서 누군가 달려와 차양 밑으로 들어왔다. 어둑했지만 붉은 머리칼이 선명하게 보였다. 딱 '중간'이라는 표현이 적합한 키와 체격의, 2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백인남자다. 남자는 한국여자와 눈이 마주치자 살짝 미소를 지으며 머리칼을 털었다. (아마도 숱한 20대 한국여자들처럼) <섹스 앤 더 시티>를 첫 회부터 마지막 회까지 빼놓지 않고 본, 그리고 '된장녀'라는 혐의에 털끗하나 아랑곳 하지 않고 상당량의 디테일을 가슴에 새기고 있으며 낭송할 의지가 다분한 한국여자는 바로 이 순간 매우 구체적인 그림을 떠올렸다. 이 상황은 정확히 캐리 브래드쇼양께서 이방인 남성에게 "이게 영화였다면 우리가 사랑에 빠졌을 텐데" 운운했다가 살짝 정신 나간 여자로 취급당했던 바로 그 장면 아닌가. 혼자 만의 회상에 빠져 조금 히죽거리고 있었을 한국여자에게 갑자기 남자가 말을 걸었다. 미국남자: 비 좋아해? 한국여자: (당황) 뭐? 아니, 싫어하는데... 미국남자: 나는 정말 좋아해. (격앙된 목소리로) 특히 비오는 날 밤 축구하는 건 끝내주지!!! 한국여자: 그럼 지금 안 달려가고 뭐하는데? 난 비도 싫지만, 이렇게 바람까지 겹치면 제대로 기능을 못해. 그래도 축구 '보는'건 좋아해. 미국남자: 난 뭐든지 보는 것보다는 하는 걸 더 좋아해. 그래, 사실 바람은 별로 도움이 안돼지. 하지만 가끔씩 폭우속에 돌아다니는 건 정말 죽여준다구. I totally dig being calm amidst chaos and all that jazz. 한국여자: 나도 '하는 걸' 더 좋아해. 다만 축구가 내 분야가 아닐 뿐이야. 노력을 안한건 아니라구. 한 8살 때 한번 해보려고 시도는 했었어.(웃음) 미국남자: 그럼 비오는 날 집에 있으면 뭐해? 너 요새 <It's Always Sunny In Philadelphia> 재방영 해주는 거 알아? 정말 영광스러운 2시간이지!! 한국여자: 몰라. 난 집에 TV도 없는 걸. 미국남자: 흠. 나한테 TV 하나 남는게 있는데. 너한테 그냥 줄 수 있어. 한국여자: .... 미국남자: 아니 아니, 섹스나 속옷이나 뭐 그런 이상한 거랑 거래하자는 거 아니거든? 나도 알아, 이상한 남자들 많다는 거. 그냥 하나 남는게 있다고 말한 것 뿐이야. 물론 내가 가끔씩 공원에서 이상한 짓(creepy things) 하는 걸 좀 좋아하긴 해.(웃음) 한국여자: 아, 이제 널 알아보겠어! 내가 저번에 공원에서 본 게 너였구나? 야...어떻게 그럴 수가...그러면 안되는 거야.. 미국남자: 잠깐 잠깐,,이거 지금 농담이야??? 정말이야, 난 나쁜 짓 안한다고. 한국여자: 그럼 넌 뭘 하는데? 미국남자: 아트 스튜디오에서 일해. 내년에 학교 졸업하고. 난 아일랜드 계야. 너에 대해서도 좀 말해준다면?(What couple of sentences would you use?) 한국여자: 난 한국에서 왔고, 미국에서의 직업은 학생이야. 오렌지 쥬스보다 사과 쥬스를 더 좋아하고, 손이 작고 손아귀 힘이 약해. 지금 내 냉장고 안에는 못 딴 사과 쥬스 한병이 있어. 미국남자: Ahn Yung Ha Seoo.....whatever. 나도 사과 쥬스를 훨씬 더 좋아해. 내 손은 작지만 발은 커. 일주일 내내 아침을 꼬박꼬박 먹어서 지금 냉장고 안에 반쯤 빈 사과 쥬스병이 있어. 야(man), 그냥 확 따버리라고. 한국여자: 내가 시도를 안한 거 아니거든? 심지어 칼로 쑤셨는데, 위험하지만 헛된 시도였지. (dangerous but futile move.) 미국남자: 난 항상 "futile"을 "few-tul"이 아니라 "few-tile"로 발음해. 틀린 걸 알지만, 그 소리가 좋아. 한국여자: 그렇게 발음하는 사람 이제까지 한 번도 못봤어. 좀 웃기지만 귀엽기도 하다. 미국남자: 아, 그 쥬스병. Well, good old Irish American muscle always works.(웃음) 아니면 렌치를 쓰거나. 한국여자: 아무래도 TV 대신 공구통을 먼저 구해야될 것 같다. 근데 그 팬시한 아트 스튜디오에선 뭐 하는데? 미국남자: 흠. 이 위압적인 몸으로 그림을 지키고 있지. 일반적인 스튜디오가 아니야. 무슨 몽환 예술이래나 뭐래나..밤이 되면 완전 미친 파티를 벌이고 약을 하기 때문에, 누구 미치거나 죽는 사람이 없나 지켜보는 게 내 일이야. 너는 뭘 하는데? 한국여자: 뻔하잖아. 기본적으로 수업에 가고, 살아 남아.(웃음) 미국남자: 나 서울에 한번 갔었어. 정말 좋아했었어. 한국말도 조금 할 줄 알아. "사랑해", "씨발새끼". 한국여자: 하하하하하하하..한국어의 핵심적인 단어들을 몇 개 알고 있네. 근데 누가 그런걸 가르쳐준거야? 미국남자: 한국친구가 있거든. 그 집 식구들이랑 놀러다니면서 술도 많이 마시고 미친듯이 놀았어. 너 혹시 "함복" 갖고 있어? 나 남자 거 완전 구하고 싶은데. 한국여자: "한복"을 들고 오진 않았어. 32번가에 가면 아마 남자 거 구할 수 있을 걸? 미국남자: "한복". 웁스-(웃음). 근데 넌 뉴욕에 와서 지금까지 뭐했어? 한국여자: 사실 여기 온지 한달 정도 밖에 안됐어. 그동안 집 구하느라 제 정신이 아니었구. 이제 슬슬 정착해가는 중이야. 뉴욕에서 할만한 생산적인 활동을 추천해준다면? 미국남자: 음-, 주말마다 카약킹을 공짜로 할 수가 있는데 요새 내가 완전 거기 빠져있어. MoMA나 자연사 박물관에 가는 것도 좋고. 나는 아마츄어 복싱도 하고 있어. 친구들이랑 놀러다니면서 랜덤으로 할 만한 걸 찾아다녀. 심지어 저번 달에는 프로페셔널/페이크 레슬링도 했었는데 정말 재밌었지. 사이언톨로지 센터도 웃겨. 아, 그리고 난 프리스비를 좋아해. 한국여자: 프리스비...? 널 놀리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 프리스비는 개들을 위한 거 아냐? 미국남자: 하하하하하...아니야. 그렇게 비꼬는 걸 보니까, 넌 프리스비를 싫어하는 구나. 한국여자: 아니 정말로 순수한 호기심으로 말한건데. 무지해서 미안하지만,,왜 영화보면 항상 사람들이 프리스비를 던지고 개들이 물어오잖아...난 진심이었다구.. 미국남자: 그래 그래. 한번 배우면 너도 완전히 빠질거야. 내가 잘 가르쳐줄 수 있어.(웃음) 그리고, 한 가지 더. I COULD OPEN THE SHIT OUT OF YOUR APPLE JUICE, LADY. 한국여자: (웃음) 만나서 반가워. 내 이름은 하나야, 너는? 미국남자: 나도 반가워. 내 이름은 Ovid야. 한국여자: 이름 웃긴다. 그거 로마 시인 이름이잖아. 미국남자: 니 이름은 유태인 여자 이름같애. 한국여자: 허! 미국남자: 허!! 한국여자와 미국남자는 거의 한시간 동안 시시껄렁한 대화를 신나게 주고 받았다. 마침내 빗줄기가 잦아들 즈음 한국여자는 미국남자의, 미국남자는 한국여자의 전화번호를 얻었다. 그리고 이것이 한국여자가 일주일 째 따지 못한 사과 쥬스병이다. ![]() ※ 로그인 사용자만 덧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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